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보의 난 (문단 편집) == 구보의 등장 == 구보(裘甫)는 절동 사람이다. 그는 859년 12월경 무리 100명을 모아 상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뒤이어 섬현을 압박했다. 이에 절동 관찰사 정지덕은 토격부사 유경과 부장 범거식을 파견하여 군사 300명을 이끌고 태주군에서 구보 일당을 토벌하게 했다. 860년 정월 4일에 동백관 앞에서 양측이 격돌하였는데, 범거식은 전사하고 유경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후 구보는 14일에 천여 명을 이끌고 섬현을 함락시킨 뒤 부고를 열어 장사를 모집해 수 천 명에 달하는 무리를 확보했다. 정지덕은 이에 맞서기 위해 다시 병졸을 모집하였으나, 군리들이 뇌물을 받고 힘센 사람의 군역을 면제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만 모였다. 장지덕은 소장 심군종, 부장 장공서, 망해 진장 이규를 파견해 새로 모집한 병졸 500명을 거느리고 구보를 치게 했다. 2월 10일에 섬서에서 양측이 맞붙었다. 이때 구보는 삼계의 남쪽에 복병을 두고 북쪽에 진을 친 뒤 냇물 상류를 막아 건널 수 있게 했다. 이후 관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척 하며 후퇴하자, 관군은 속아 넘어가 뒤를 쫓았다. 그러다 관군이 냇물 반을 건넜을 때, 구보가 막은 것을 터트리면서 물이 크게 닥쳤고, 관군은 크게 패했다. 심군종, 장공서, 이규 모두 전사하였고, 관군은 거의 다 없어졌다. 구보가 관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다는 소식이 퍼지자, 산과 바다에 있던 여러 도적과 다른 도의 유랑민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결과 3만에 달하는 무리가 그에게 복종하였고, 구보는 이들을 32대로 나누었다. 또한 책사로 유왕을 맞이하였고, 유경과 유종간을 장수로 삼았다. 구보는 편지와 비단을 각지로 보내 귀순을 요구했다. 또한 스스로 천하도지평마사라 칭하고, 기원을 나평(羅平)으로 고쳤으며, 인장을 주조하여 천평(天平)이라 하였다. 물자와 양식을 크게 모으고 훌륭한 공인(工人)을 모집해 무기와 기계를 정비하니, 그의 명성이 중원을 흔들었다. 절동 관찰사 정지덕은 조정에 표문을 거듭 올려서 급박한 사정을 설명하고, 이웃한 도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절서에서는 아장 능무정에게 400명을 맡겨 구보 토벌을 맡겼고, 선흡에서는 아장 백종에게 300명을 이끌고 정지덕을 돕게 했다. 정지덕은 지원군과 합세한 뒤 외곽의 성문과 등소강에 주둔하였으나, 얼마 안 있다가 다시 부 안으로 들어와서 스스로 지켰다. 그가 구원 온 장사들에게 급료를 평소의 13배나 올려 지급했으나, 장사들은 오히려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고 구보와 싸울 때 온갖 태업을 일삼았다. 어떤 이는 병을 핑계 댔고, 어떤 이는 일부러 말에서 떨어졌으며, 전투에 참가하는 대가로 먼저 군직과 훈급을 요구했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으니 성과가 있을 리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